국사교과서 내용: " ...고려의 무신정권이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39년간이나 저항한 곳이 지금의 강화도이다. 당시의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부처님의 힘을 빌어 국란을 극복하고자 팔만대장경을 제작하였고, 그것은 지금의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몽골군의 39년간 침략으로 국토는 몽골의 수중에 넘어가고 과연 지금의 강화도에서 고려가 견디었을까? 수 만에서 수 십만에 이르는 몽골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고려도 역시 최소 수 만의 군대가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는 강화도는 너무 작습니다. 그렇다면 수 십년동안 그 많은 사람들 (가족 포함) 이 먹을 양식은 어디서 조달하고 기타 생활용품은 어디서 조달했을까요? 백성들이 몽골군의 감시를 피해 조공을 바쳤다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말을 타고 강을 건너 산을 넘어 신속한 진군을 한 그들이 언제 배를 만들고 있겠습니까? 물론, 수전을 잘 한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정복한 곳은 대부분 육지였으므로..굳이 배를 타고 점령한 곳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건넌 황하, 양자강, 멀리 중앙아시아와, 중동, 유럽의 수많은 이름있는 강들은 그들은 그냥 말을 타고 건너서 세계를 정복한 것입니다. 몽골군이 침략때마다 수 만에서 수 십만씩 쳐들어 온다면 강화도에 고려군도 수만에서 수십만은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릅니다만.. 더군다나, 몽골침입기간동안에 여러 고려왕이 바뀌었다면 그들의 왕릉은 강화도의 어디에 있습니까? 왜 아직도 못 찾고 있다는 소리만 하나요? 아, 강화도가 좁으니까 왕릉을 만들지 않았던가. 만일에 대비해서 아무도 못찾을 만한 곳에 만들었나요? 거꾸로, 몽골측의 기록을 보면 고려에 전쟁하러 간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고려땅에 가서 사냥을 좀 하고 오겠다고 하거나..이런 한가한 소리나 적고 있습니다. 물론 고려를 업신 여긴지도 모르겠지만..오히려 술대접을 받고 돌아오고 한 기록이나 있지, 고려를 적대적으로 표현한 곳은 없다고 합니다. 또, 39년동안 전쟁을 벌일만큼 우리가 배운 고려는 크지도 값진땅도 아닙니다. 세계각지의 기록을 보면 굳이 필요없는 곳은 몇 번 싸워보다가 그대로 포기한 곳들도 많습니다..(월남등지) 더군다나 몽골과의 대규모전투는 전혀 없고, 소수의 소속모를 몽골병과의 국지적인 전투만 있을 뿐입니다. 아~ 등잔밑이 어둡다 작전인가봅니다. 강화도에 대장경이 있음을 간파한 몽골군을 속이고, 오히려 합천 해인사로 옮겼다.. 8만 대장경은 분량도 엄청난 목판입니다. 이것을 옮기는 것도 장난이 아닐텐데...아무리 한밤중에 나른다해도 몽골군이 가만히 두었을까요? 비행기가 있던 것도 아니고, 아비터를 이용한 소환일까요? 강화(江華).. 대륙 호남성(湖南省) 강화(江華)현 동남쪽- 옛 영주부(중국 고금지명사전 기록) 대륙의 기록은 강화를 이렇게 위치한 다고 기록하고 있고, 우리는 지금의 반도가 강화(강화도라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강화라고 하니 강화도라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어째 기록이 서로 다른지.. "... 강화의 공공전답에서 쌀 2,000섬, 조 3,000섬을 수확했다. 똑같이 [우이(又以)] 최씨의 집에서 수확했다. 하음, 진강, 해령의 전답에서 수확물을 제후, 제왕, 재상인, 추밀원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차별있게 나눠줬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이(又以)라는 글자가 뜻하는 바이다. 우(又)자와 어조사 이(以)자. 또 똑같이라는 뜻- 공공전답에서 5,000섬, 또 똑같이 최의 가정에서 5,000섬 합계 1만섬을 수확했다는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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