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축제소개

사랑을 믿었다

오우정 2010. 12. 14. 04:59

신달자 시인 “사랑을 믿었다, 무너진 산에 깔려 있으면서도”

경향신문 | 입력 2008.04.02 15:10

 

ㆍ자전적 산문집 '나이 마흔에…' 출간

ㆍ24년간 희귀한 뇌질환 앓다 간 남편

ㆍ반신불수 시어머니 9년간 병상 수발

ㆍ"나는 인생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

 

 

↑ 아내와 가족이란 이름으로 감당해야 했던 치명적 고통을 겪고난 후 비로소 ‘물 같은 평화’를 얻었다고 술회하는 신달자 시인.

'그가 눈을 뜨고 정확하게 3년이 지나면서 나는 그가 살아났다는 것에 대해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때 진작 죽었어야 했는데 저걸 살려 냈다니….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이렇게 말을 해서. 그러나 나는 너무 무지했으므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거야. 그런데 그 희망의 해를 품는다는 것은 내 가슴이 먼저 활활 타고 내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내 인생이 넝마처럼 펄럭인다는 것을 몰랐던 거야.'(29쪽)

신달자 시인(64·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이 신산했던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백치애인' '물위를 걷는 여자' 등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교수, 화사한 웃음과 세련된 외모, 그 뒤에 그런 엄청난 고통과 슬픔이 스며있을 것이란 짐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외이고 놀랍다.

15세 연상이었던 그의 남편은 1977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24년간 희귀한 뇌질환을 앓다가 2000년 세상을 떠났다. 그 사이 팔순의 시어머니가 척추골절로 반신불수가 돼 9년을 집안에 누워있었다. 세살짜리 막내까지 딸 셋을 둔 서른다섯의 주부였던 그의 앞에 닥친 가혹한 운명과 그런 불행을 이겨낸 세월을 신 시인은 신작 산문집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민음사)에 담았다.

"딸들에게조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입니다. 내 부끄러운 면을 드러낸다는 게 쉽지 않았어요. 남편이 죽은 지 1년 뒤에 벅찬 마음으로 썼다가 2년쯤 지나서 고쳤는데 다시 묻어두었습니다. 출판을 할까말까 많이 망설였지만 나처럼 글쓰는 여자가 이런 특이한 경험을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고통의 이웃이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늦깎이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제자 '희수'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쓰여진 산문에서 신씨는 괜찮았던 한 남자가 병으로 인해 육체와 정신이 무너져내리는 과정, 아내와 가족이란 이름으로 감당해야 했던 치명적인 고통, 그리고 시련을 끝까지 이겨냄으로써 비로소 이른 '물 같은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무거운 짐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함으로써만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는 아프지 않았지만 죽었고 그는 아팠지만 살아 있었다. 그것이 24년간의 우리 부부 생활이었다. 나는 그동안 소리 없는 총기를 구하고 다녔다. 그래, 물론 그의 심장을 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야. 누가 발사했는지 찾을 수 없는 미궁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총기를 나는 결국 구하지 못하고 말았다.'(13쪽)

남편의 임종에서 시작된 그의 회상은 77년 5월11일,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23일간 혼수상태에 빠졌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자의 생일에 점심으로 국수를 먹던 남편이 갑자기 쓰러졌다. 바늘로 머리 뒤를 찔러 피를 내주면 좋다는 속설이 떠올랐지만 벌벌 떨리는 손은 그 일을 하지 못한다. 서툰 의사는 병원으로 옮겨진 남편의 척추에서 주사기로 피를 뽑는데 그 또한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절망적인 상태로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남편을 하루 두 번 면회하기 위해 노심초사 기다리는 그녀에게 9년간의 결혼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노사관계에 대해 선견지명을 보인 촉망받는 학자(고 심현성 숙명여대 교수)였던 남편과의 결혼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남편은 재혼이었고 주변의 반대도 심했다. 신씨는 신혼여행을 갈 때 남편이 한마디 상의도 없이 행선지를 부산에서 인천으로 바꾸고, 빨간색 여행 드렁크를 내내 자신에게 들게 했던 일을 떠올린다. 아내의 마음을 모르는 매정한 남편인 데다 사랑보다는 갈등과 미움이 많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아빠이고 성실히 살아온 한 인간이기에 반드시 살리고 싶었다고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중국에서 좋다는 약을 구해와 의사 몰래 링거에 집어넣고 굿판까지 벌였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기적처럼 다시 일어났지만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나무토막이 됐고 '시상하부과오종'이라는 후유증 때문에 한 번 웃기 시작하면 약기운이 돌 때까지 몇 시간씩 그치지 못했다. 웃음이 겨우 가라앉으면 이번에는 사흘씩 딸꾹질을 했다. 뇌손상으로 인해 어린아이의 지능으로 돌아간 그는 병문안 온 손님 앞에 놓인 사과를 권하지도 않고 몽땅 먹어버리기도 했다.

'통곡도 시원찮은데 웃는 그 남자를 보는 일은 머리가 휑 도는 일이었다. 그런 몰골로 웃는 남자를 바라보는 이런 비극을 넌 상상이나 하겠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웃기 시작하면 뺨이라도 치고 싶었다. "지금이 웃을 때야!" 그렇게 미친 듯이 외치면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병신이지."'(106쪽)

그는 마비된 남편의 몸을 되돌리기 위해 거친 수건으로 하루 종일 몸을 문질렀다. 하루 두 번 목욕을 시킬 때는 도저히 옮길 수가 없어서 타월 위에 남편을 올려놓고 질질 끌어 목욕탕으로 데려가 씻긴 뒤 다시 그 타월을 끌고 방으로 왔다. 약 다리고, 목욕 시키고, 주무르고, 아이들과 노모 돌보고, 살림하느라 잠잘 시간조차 없는 고된 하루가 이어졌다. 그 정성에 힘입어 남편의 몸은 조금씩 좋아졌으나 정신은 오히려 망가졌다. 주변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조울증이 찾아와 시시때때로 '죽지 않을 만큼만' 자살기도를 하고 정신병원에 여러 차례 입원했으며 약기운이 떨어지면 신경질을 부리고 점점 거칠어졌다.

'불러서 바로 대답만 하지 않아도 집안은 수라장이 되었어. 나는 타작 마당의 벼처럼 껍질이 벗겨지면서 그의 양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심심하면 매질을 했거든. 뼈가 부러지기도 하고 눈알이 터지기도 하고 허리를 밟히기도 하였다.'(147쪽)

감정적으로 느끼는 불행은 차치하고라도 무엇보다 돈 문제가 심각했다. 남편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남들이 좋다는 약은 무엇이든 사들였다. 살고 있는 집 외에 갖고 있던 집 한 채는 급한 마음에 시세의 절반에 이미 팔아버렸다. 그는 여고시절 경남백일장에서 1등을 할 만큼 일찌감치 촉망받는 시인이었지만 시는 돈이 돼주지 못했다. 고민 끝에 양복 천을 팔러다니는 보따리 장사에 나섰다. 그러나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지인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받았던 모욕감에 지쳐 천 보따리를 욕조물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내 인생의 중대한 시점에 서 있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선택하지 않으면 나의 모든 인생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169쪽)

마흔살에 그는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아빠는 환자고 엄마는 보따리 장수면 우리 딸들이 시집이나 갈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책을 잡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대학원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헌책방에서 영어책을 사다가 온 집안에 펼쳐놓고 설거지를 하면서, 지압을 하면서, 걸레질을 하면서, 남편을 목욕시키면서 공부를 했다. 그래도 공부는 남편이 쓰러지기 전, 그가 주는 돈으로 쌀과 연탄을 사고 김치를 담그는 것 외에 더이상 아는 게 없었던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간강사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쓰러졌다. 여든한 살의 시어머니는 방바닥에 넘어지면서 척추뼈가 가루가 될 정도의 큰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아흔에 돌아가실 때까지 9년을 누워있었다.

'그 시절 어머니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나는 여름밤 벼락이 치면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내가 시어머니를 미워한 만큼 벼락은 무서웠던 것이다.'(185쪽)

다행히 대학원에 입학하고 난 뒤 그의 생활은 조금씩 달라졌다. 첫 수필집 '다시 부는 바람'이 5000부나 나갔고, 88올림픽 직후에 낸 두번째 수필집 '백치애인'은 신달자란 이름을 대중에 각인시켰다. 이어 장편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는 100만부 이상 팔리고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그 인세로 빚을 청산했다. 남편도 학교 측의 도움으로 숙명여대에서 계속 강의를 했으며 나중에는 학장까지 지냈다. 그는 남들에게 불행한 여자로 보이지 않도록 일부러 예쁜 옷을 입고 밝게 웃었다.

그 과정에서 신 시인은 천주교에 귀의했다. 남편이 혼수상태에 있을 때 절망에 빠진 채 병실을 나와 하염없이 걷다가 들어간 곳이 성당이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면서 "주여! 주여! 주여!"를 외쳤다. 그후 성모님은 억울하고 속상할 때마다 찾아가서 불평하고 두드리는 '샌드백'이 되어주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남편은 2000년 10월21일 눈을 감았다. 죽기 이틀 전 그는 간병인을 물리치고 둘이 있는 자리에서 심각하게 "나 죽거든 결혼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내 인생의 십자가였던 사람이 자식들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내 팔에 안겨서 그림처럼 멋있게 죽었다"고 말하는 신시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그의 긴 이야기는 끝이 났다. "곤두박질하는 삶 속에서 죽을까 아니면 도망갈까 늘 생각했지만 끝까지 나한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고통을 잊고 편안해졌다"고 말했다. "내 몸을 빼면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상황에서 혼자 빠져나왔다면 당장은 몰라도 그 고통을 평생 지고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열심히 살았고, 열정을 잃지 않았고, 무너진 산에 깔려 있으면서도 사랑을 믿었고, 내일을 믿었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축복을 받았고, 딸들을 얻었으며 무엇이 가족 사랑인지 알았고, 국가나 세계가 강해져야만 하는 것처럼 어머니는 강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내게 영원히 싸우고 사랑할 것은 삶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아름다운 일상생활이 중요하다는 것을, 삶을 꼼꼼하게 살아야겠다는 것을 알았고, 주변과 다사로운 풍요한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남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가 재직했던 학교에 감사하고, 그의 친구들에게 감사하고, 그리고 나의 직장에 감사하고, 그리고 오래 내 괴로운 인생을 다독거려 준 내 친구들에게 정말 감사하다. 그리고 나의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256쪽)

신씨는 대학에서의 마지막 해를 앞두고 자신의 삶을 결산하는 의미로 흔한 '퇴임 기념 논문집' 대신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인생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며 "남은 시간 동안 좋은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 글 한윤정·사진 박재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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