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축제소개

비내리는 고모령

오우정 2009. 10. 21. 18:17
우리 가요사에서 시대적 감정과 국민적 정서가 함축되어 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 가슴 저리게 애창되는 [비내리는 고모령]은
박시춘에 의해 작곡되어 가수 현인에 의해 1946년에 불리워진
곡으로, 원래의 뜻은  일본제국주의 시대 고향을 등지고
타향으로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슬픔을 담은 노래로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유행가이다.
 
그토록 많은 중년들로부터 애창되는 [비네리는 고모령]은
대구 망우공원 근처에 위치한 고모령 (해발 160m)은,
지금은 경부선 때문에 산은 잘리고 망우공원에서
파크호텔 팔현부락을 거쳐 고모역으로 이어
지는 옛 고갯길이 전설과 함께 남아있다.
 
 
 

망우공원의 횡단 보도 옆에는 [비내리는 고모령]의 노래비가 있다.
사실 노래비가 서 있는 이곳의 지금 행정구역은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이다.
 
 
 

노래비가 있는 곳에서
이 길을 따라 약 3km만 가면 이모역도 아닌--- ^(^
동대구역과 경산역의 중간역인 고모역이 있다.
 
 

 
고모령과 관련이 있는 전설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전해지는 이야기로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제국주의
시대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자식과 어머니]의
일화를 간직한 전설이 그것이다.
 

◈ 고모령에 얽힌 사연(1) ◈ 
 
고모령에 얽힌 전설 중 [오누이 힘겨루기]는
전국에 걸쳐 전승되는 이야기로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 갓날 갓적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이 마을에는
남매를 데리고 사는 홀어머니가 있었다. 그런데, 이 남매는
힘이 어찌나 센지 나라에서 그 힘을 당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특히 누이동생은 여자였지만 오빠에게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힘이 대단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부러워했다. 사람들이 자기보다 누이동생을 더 칭찬하고
아끼는 것을 본 오빠는 점점 심술이 나기 시작했다.
 
[흥, 계집애 주제에 남자인 나보다 힘이 셀 리가 없는데,
사람들은 왜 동생만 이뻐하지~? 그렇지, 내가 누이와 힘겨루기
시합을 해서 내가 이기는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다져먹은 오빠는 어머니가 외출한 날을 골라
시합을 하리라 작정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볼일을
보러 외출한 틈을 타서 오빠는 누이동생을 들판으로 불러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남매가 사는 마을 주변에는 산이 없고 평지만
있었다. 들판으로 불려나온 누이동생은 의아한 표정으로 오빠를
쳐다보았다. 오빠는 누이동생의 감정을 건드리기 위해
살살 약을 올렸다.

[내가 요즘 보니까 네 힘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아서 걱정이 돼서
그런다.] 약이 오른 누이동생은 오빠의 계획에 말려들어 그만
자신의 힘이 줄어들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오빠와
힘겨루기 내기를 하자고 제안하게 된다.
 
오빠는 못이기는 척 하고 동생과 내기를 시작했다.
들판에 있는 흙을 파다가 산을 쌓는 것인데, 해질 때까지
누가 높게 쌓는가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열심히 흙을 퍼날라다가 산을 쌓기 시작했다.
오빠는 저고리의 앞섶으로 흙을 날라다 산을 쌓았고, 누이동생은
치마폭으로 흙을 날라다 쌓았는데, 해가 질 때 서로 비교를
해보니까 누이동생이 쌓은 산이 훨씬 더 높았다.
 
이에 심술이 난 오빠는 누이동생이 쌓은 산을 발로 뭉개버렸다.
그리하여 두 개의 봉우리 중에 뭉툭하게 된 것이 누이동생이
쌓았던 봉우리가 되어 버렸다. 그 후 이 두 봉우리는 형제봉,
혹은 남매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남매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죄책감에 집을 나와 버렸다. 마을을
나와서 작은 고갯길을 넘어가던 어머니는 차마 그냥 갈 수 없어서
그곳에서 고개를 돌려 남매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고 하여
고모령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고모령 옆에 있는 형제봉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이 줄기가 북쪽으로는 낙동강에 닿아 있고, 동쪽은 경산벌판이며,
서쪽은 대구가 되는데, 이곳에서 대구시 전체가 한눈에 보이기
 때문에 전략상 대단히 중요한 곳이라고 한다.
 

◈ 고모령에 엃힌 사연(2) ◈
 
고모령과 관련된 일본제국시대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 왜정 시대에 경산에 있는 작은 마을에는 어떤
아주머니가 살고 있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면서 살았는데,
독립운동을 하던 두 아들은 왜놈에게 잡혀서 모두 대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남편없이 기른 두 아들이 모두 감옥에 가 있는 것이
어머니로서는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는지라 시간만 나면
감옥으로 면회를 가곤 했다.

그날도 대구 감옥에 있는 아들을 면회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고모령 고갯길에 이르렀는데 그날따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서러움으로 고모령을 넘어오던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경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고개를 넘어야 하고,
그 고개를 넘으면 대구가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 고개는 고개를 돌려서 본다는 고(顧)와
어머니 모(母)를 붙여서 고모령이라고 하여 동네 이름도
고모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1991년 10월에는 대구 수성구 의회 개원 기념으로
[비내리는 고모령] 노래비를 망우 공원 안에 세웠다.
노래는 이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의 것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