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여행,

화계사(서울)

오우정 2008. 12. 24. 04:52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1522년(중종 17) 신월(信月)이 창건했고 1618년(광해군 10) 화재로 전소되자 흥덕대군(興德大君)의 시주로 도월(道月)이 중창했다.

그뒤 건물이 많이 퇴락하자 1866년(고종 3) 용선(龍船)과 범운(梵雲)이 흥선대원군의 시주를 받아 중창했으며 이후로도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현재 당우로는 대웅전·명부전·삼성각·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범종각·보화루·학서루(鶴棲樓) 등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팔작지붕 다포계(多包系)로 현판은 당대의 명필 신관호(申觀浩)의 필적이며 명부전의 현판과 주련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또 이 절에는 1898년 경상북도 풍기 희방사(喜方寺)에서 옮겨온 대종(大鐘)과 북이 있다

 

 일주문 생각보다는 화려하고 크다

 

  일주문을 옆에서

     일주문의 천장 문양이 다양하고 화려하죠

 

                        3층누각이 대단하죠

 

 

 

 

 

 

                     팥죽을 쑤고있는 모습

 

 

 

            큰 가마솥에 팥죽을

 

 

 

 

 이것이 희방사에서 왔다는 종인가 보다

 

 

 

 

 

 

 

 

                                   1층은 종 2층은 북 이것도  특이하죠

 

 

 

 

 

 

 

                          대원군의 글씨란다

 

 

 

 

 

 

 

 

 

 

 

 

 

  추사 김청호의 제자 신관호의 글씨

  대원군의 글씨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인인 여흥 민씨는 외가의 원찰인 화계사를 자신의 원찰인 것처럼 자유롭게 출입을 하고 있었던 터이라 대원군도 자연 이곳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화계사와 깊은 인연을 맺어 장차 왕업을 이루려는 꿈을 꾸게 되었으니 그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어느 여름 날 흥선대원군이 남루한 차림으로 화계사를 찾게 되었다.

 서울에서 십리 길이라 화계동구에 도착하였을 때는 갈증이 몹시 심하였다.

그런데 절 앞 느티나무 아래에서 웬 동자승이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꿀물이 든 사발을 내밀었다.

기이하게 여긴 대원군은 그 연유를 물었고, 동자승은 그 일을 시킨 만인(萬印)스님에게 안내하였다.

만나서 심금을 터놓게 되었는데 만인스님은 흥선대원군의 야심을 꿰뚫어보고 있는지라

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로부터 왕진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게 되었다.

만인스님은 인연의 도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탄식하고 자신이 불가(佛家)의 중죄인이 되어 업보를 면할 수 없을 것이나

시운(時運)이라 하며 그 방법을 일러주었다. 충청도 덕산(德山) 가야산의 가야사(伽倻寺) 금탑자리가 제왕지지(帝王之地)이니

남연군 묘소를 그리로 이장하면 제왕이 될 귀한 왕손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대원군이 많은 돈을 마련하여 가야사를 찾아가 그 곳 주지를 매수하여 가야사에 불을 지르도록 하였다.

탑을 허물고 여러 형제들을 설득하여 그곳으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해 갔다. 그 후에 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탄생하였으니,

스님의 말이 꼭 들어맞은 셈이다.
사실여부야 따질 일이 아니지만 어떻든 이런 전설과 부합되는 흔적을 사적기나 현존 건물 및 대원군 친필의 여러 현판 글씨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게단옆에있는 묘한 돌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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