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여행,

유금사

오우정 2017. 7. 28. 09:15

 

 

 

 

 

 

 

 

 

 

 

 

 

 

 

 

 

 

 

 

 

 

 

 

 

 

 

 

 

 

 

 

 

칠보산 유금사 (七寶山 有金寺)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금곡동 815 조계종제11교구 불국사말사

 

 

칠보산 유금사(七寶山有金寺)는 산의 이름과 절의 이름에 모두 신라 왕실과 얽힌 깊은 사연이 깃들어 있다. 칠보(七寶)란 산의 이름에는 선덕여왕의 일곱 공주가 이 산에서 보살이 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유금(有金)이란 절의 이름에는 왕실에서 필요한 금을 이 산에서 캐다 쓰면서 금의 중요함을 부처님의 보살핌으로 지키기 위해 이곳에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유금사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절에는 금으로 된 사보(寺寶)는 없다. 다만 칠보산이 갖는 칠보의 의미를 들으면서 조상들이 진정 귀하게 여긴 것이 무엇인지 새길 수 있고, 금의제국으로까지 불렸던 신라의 금 산지의 이야기가 이제 전설로만 남겨진 현장에서 비구니스님들이 청정하게 가꾸어가는 알콩달콩한 절집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다.

 

<금을 지키기 위해 세운 절>

 

절 앞에 이르면 일주문이 산길을 찾아온 길손을 반긴다. 처음 유금사를 찾아갔을 때(1994)는 막 일주문을 준공했을 무렵이었다. 사방의 전답들이 묵어가면서 을씨년스러워져 가던 산골에 작지만 아담한 일주문이 세워지고 곱게 단청을 올리자 마을을 지키는 촌로들은 새로운 희망을 바라보듯 제 일처럼 좋아하고 있었다. 지금 다시 찾아가니 이번엔 일주문 뒤에 누각을 짓고 있다.

 

이 누각도 단청을 올리고 편액을 달면 절집 모습이 한결 새로워지리란 생각이 든다. 마당에 올라서면 정면에 대웅전이 좌정했다. 이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전각의 기본배치가 바다를 내다보는 동향이다. 마당 좌우에는 요사가 마주보고 있다. 이 모습들은 예전 그대로이다. 대웅전 뒤에는 산령각이 있다. 이것이 유금사 당우의 전부이다.

 

유금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AD646)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된 큰 사찰이었으나.  어느 날 홍수로 절이 소멸되고 금선암만 남았다.

 

칠보산의 이름에 나오는 일곱가지 보배는 돌옷 더덕 산삼 황기 멧돼지 구리 철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이 산에는 금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금관을 제작하는 등 금세공이 발달했던 신라 왕실은 중요한 금의 채굴과 관리를 위해 자장율사로 하여금 이 산에 절을 짓게 했다는 것이다. 전하는 말에는 신라 왕실이 이곳에서 금을 캘 때는 손으로 주을만큼 생산량이 많았다고 한다. 신라가 자랑하던 보물인 금척(金尺)도 구장자(具長者)란 사람이 이곳에서 발견하여 나라에 바쳤다는 전설도 있다.

 

<설화로만 남은 역사>

 

하지만 유금사의 내력은 모두 설화로만 남아 있다. 신라 말의 어느 때라고 한다. 주지스님이 서라벌(徐羅伐)에 다녀오는 길에 느낌이 이상하여 걸음을 재촉하는데 절 앞 용소를 지날 무렵 큰 용 두 마리가 운무의정을 나누고 있었다. 스님이 이를 보고 고약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용이 이를 알아채고 조화를 부린 것인지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산사태가 일어나 절을 덮쳐 당우는 물론 많은 스님들까지 매몰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 재난으로 유금사는 폐허가 되고 건너편의 작은 암자인 금선암(金仙庵)만 남아 있었는데 이 때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후비인 장화부인(莊華夫人)이 이곳에 찾아와 머물며 기도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신라 말엽 장화부인(경순왕 후비)은 정비의 소생인 마의태자(麻衣太子)를 사모했으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한탄하고 정처 없이 헤매다 찾아온 금선암에서 머리를 깎고 축단을 세운 뒤 태자가 왕위에 오를 것을 축원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던 장화부인은 신라가 망하고 마의태자는 베옷을 입고 금강산(金剛山)으로 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식음을 끊고 지내다 끝내 숨지고 말았다고 한다.

 

최근까지 금선암 터와 장화부인이 쌓았다는 축단, 그리고 장화부인을 기리며 지은 산신각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 후 조선 철종 10년(1908년)에 화재로 대웅전을 사루고 요사채 등은 반소되어 다시 재건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유금사는 불국사 말사로서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금곡3리 유금동 칠보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보물 674호로 지정된 3층석탑이 남아 있다. 그 후 1993년 음력 9월에 대웅전 중창부사 회향과 1994년에 요사채를 신축하였으며 2006년에 대웅전을 전면 보수중에 있다.

 

<모습을 일신하는 유금사>

 

유금사는 설화로 남은 신라시대의 이야기 후로 전하는 연혁이 없다가 조선 철종 9년(AD1858) 중수하였으나 순종 2년(AD1908) 다시 소실돼 중건하였다. 이 중건과정에 천정에서 발견된 금서(金書)로 인해 조선 인조 5년(AD1627)에 중창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것이 유금사의 내력이 기록의 남은 최초의 일이다.

 

지금까지 유금사를 지탱해온 건물들은 대개 순종 2년 중건된 건물들이었는데 낡고 협소해 1990년대에 들어 새로운 중창불사가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93년 9월 정면3칸 측면3칸의 맛배지붕 구조인 대웅전을 신축 회향했고 그 이듬해에 요사 1동을 개축했으며 이 때 일주문도 함께 세웠다.

 

그 후로도 불사를 계속해 나머지 요사 1동을 개축한데 이어 지금은 누각을 다시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당우의 측면에서 사찰의 모습이 거의 완비된 셈이다.

 

유금사 대웅전을 뒤로 돌아 들어가면 3층 석탑 1기가 있다. 보물 674호인 유금사석탑이다. 대부분의 사찰들은 석탑이 대웅전 앞에 있게 마련인데 유금사는 특별하다.

 

그래서 칠보산을 찾은 등산객들은 대부분 마당에서 몇 채 되지 않는 전각들을 두리번거리다 유금사를 모두 살펴본 것으로 생각하고 수통에 물을 채워 절을 떠난다. 유금사의 1,300년 역사와 호흡을 함께하는 석탑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석탑의 위치가 이처럼 된 것은 인조 때 앞쪽에 있던 대웅전을 뒤로 옮기면서 탑도 함께 옮겼는데 위치가 마땅치 않아 대웅전 앞이 아닌 뒤로 옮겼다는 것이다. 지금 이 석탑은 기단 아래쪽이 갈라져 도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해체보수가 시급한 것이다.

 

만약 해체 보수가 이루어진다면 위치 또한 넓어진 앞마당으로 옮겨 가람의 배치에 맞게 탑의 자리도 제대로 잡아주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전하는 말에는 이 탑을 뒤로 옮길 때 안에서 금불상이 나와 국보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보내졌다고 한다. 그러나 국립박물관에는 유금사에서 출토되었다는 금동불상은 없다.

 

소문을 확인해볼 여지라면 현재 국립박물관에서 출토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금동불상인 국보 2점과 보물 2점의 출토지를 규명해보는 방법뿐이다. 혹시라도 이들 중 한 점이 유금사 석탑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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