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여행,

첨성대

오우정 2010. 3. 8. 08:06

 

  국보 31호 상부와 기단을 배면 음력인 361개로 축조되엇다고한다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세운 천문대.
첨성대 /첨성대(신라), 국보 제31호, 높이 ...
국보 제31호. 높이 약 950㎝.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천문대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첨성대의 구조는 기단부(基壇部)·원주부(圓柱部)·정자형두부(井字形頭部)로 나누어진다. 기단부는 사각형 모양으로 상하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상단은 한 변이 518㎝, 높이 39.5㎝인 직육면체 석재 12개로 이루어져 있다. 하단은 이보다 약간 큰 한 변이 536㎝, 높이가 39.5㎝인 직육면체 석재 20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단의 방향은 남쪽 변이 정남에서 동쪽으로 19° 돌아가 있다. 원주부는 총 27단으로 높이는 805㎝에 이르며 술병 모양을 하고 있다. 제일 아랫단의 둘레는 1,600㎝, 14번째 단의 둘레는 1,170㎝, 제일 윗단의 둘레는 920㎝이다. 아래부터 제12단까지는 각 단의 높이가 약 30㎝이다. 중앙의 출입구는 제13~15단에 걸쳐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약 95㎝이다. 출입구의 방향은 정남쪽에서 동쪽으로 16° 돌아가 있다. 출입구 아랫변의 돌은 커다란 평판석(平板石)으로 되어 있으며 13단 이상은 내부가 비어 있다. 그리고 평판석에는 사다리를 걸쳤다고 생각되는 홈이 출입구 양 끝에 파져 있다. 13~27단까지 비어 있으므로 관측자가 사다리를 설치하고 아래위로 오르내렸을 것이다. 정자형의 두부는 상하 2단의 정자형 구조로 각 단은 306×32×32㎝ 크기의 석재를 4개씩 정자형으로 물려놓았다. 정자석의 내부에 220×64㎝의 공간이 확보되므로 하부에 나무판을 깔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첨성대 전체의 석재는 화강암으로 총석재수는 365개 내외이고, 기단부, 원주부의 외벽과 정자형 두부는 다듬어져 있으나 내벽은 잘 다듬어져 있지 않다.
첨성대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조(善德王知幾三事條) 끝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것이 처음이다. 이어 〈고려사〉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있다. 보다 자세한 기록은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첨성대조에 "첨성대는 경주부의 남쪽 월남성에 있는데, 당태종(唐太宗) 정관(貞觀) 7년 계사년(癸巳年:633)에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원형이다. 높이가 19.5척, 위의 둘레가 21.6척, 아래 둘레가 35.7척이다. 가운데를 통하게 해서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설명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 있다. 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는 기록은 그밖에도 〈서운관지 書雲觀志〉나 〈문헌비고 文獻備考〉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첨성대가 과연 천문대였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먼저 첨성대에 대해 현대적인 해석을 한 사람은 일제강점기에 조선기상관측소에서 근무했던 일본인 와다[和田]였다. 그는 1910년 〈조선관측소 학술보고〉의 '경주첨성대의 설'에서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가구물을 세우고 혼천의(渾天儀) 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던 천문대였으리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1917년 〈조선고대관측기록 조사보고〉에서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우리나라 학자인 홍이섭(洪以燮)도 〈조선과학사〉에서 신라에서는 독자적인 천문관측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주 첨성대를 들 수 있고 이것은 현존하는 동양최고의 천문대라고 평가했다. 또한 첨성대에 대해 처음으로 정확히 실측하고 연구한 홍사준(洪思俊)은 첨성대 내부에 사람이 들어가 27단의 내부에 반듯이 누워 중천을 쳐다보며 관측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첨성대가 개천설(蓋天說)에 의거하여 백제인이 세운 신라 천문대라고 보았다. 박동현(朴同玄)도 첨성대가 개방식 돔 형태를 가진 천문대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와 같이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견해는 8·15해방 전부터 1960년대까지 정설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후 상설천문대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전상운(全相運)은 첨성대가 규표(gnomon)를 중심으로 한 다목적 관측대일 것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개방식 돔으로 관측하기에 불편한 내부구조를 근거로 상설 천문대로 보기 어려우며 백제인들이 주비(周髀)의 법에 따라 세웠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이와 비슷한 견해로 김용운(金容雲)은 첨성대가 실제로 관측에 사용된 것이 아니며, 다만 수학 및 천문학에 관한 당대의 권위서였던 〈주비산경 周髀算經〉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축조한 상징적인 탑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용범(李龍範)은 첨성대는 천문관측과는 관련이 없으며, 다만 불교의 우주관인 수미산(須彌山)의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이라고 주장했다. 또 박성래(朴星來)는 첨성대를 넓은 의미의 천문대로 평가하면서도 겉 모양은 불교의 수미산을 좇았으며, 토속신앙에 따른 농업신인 영성(靈星)을 숭배하기 위한 제단이었다고 추측했다. 이와 같이 첨성대에 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데, 구조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천문대와는 다르다 하겠지만 소박한 의미의 천문관측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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