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점심 시간 서울시내 유명 평양냉면집에 들르면 식탁마다
‘평안도’ 향우회가 벌어진 듯한 풍경을 볼 수 있다.
한국전쟁 후 고향을 떠나온 평안도 사람들이 을지로 주변의 평양냉면집에 모여 가족·친지·친구들의 안부를 나누며
실향을 아픔을 달래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가면 자연스럽게 평양에서 건너온 ‘서울식 평양냉면’의 역사를 듣게 된다.
“가을걷이한 햇메밀로 국수를 냈지. 그리고 꿩고기를 삶고 김치국물을 부었어.
이북김치가 모냐, 이따만한 김장독에 배추넣고 무를 많이 넣고 물을 해 붓는단 말이야.
거기에 잘 사는 집은 고기 삶아 (국물을) 붓기도 하고, 못 사는 집은 동태국물을 부어서 해 먹었지.”김지억(76)
“평양에 냉면이 왜 유명하냐? 평양이 원래 물이 좋잖아. 메밀도 중요하지만, 냉면 맛은 물맛에 따라 다르지.
그러니까 동치미가 맛있는 거고, 그래서 평양냉면을 알아준거야. 동치미는 무 물이거든. 그러니까 무를 많이 넣어야 돼.
그래야 톡 쏘는 맛이 난다고. 거기에 메밀 국수를 말아 먹으니까 시원한 거지.” 박윤성(77)
“이북 사람들은 이게 주식이었어. 나 학교다닐 적만 해도 100호 마을에 냉면집이 서너집은 됐었지.
부잣집들은 집에서 (국수를) 누르고 가난한 집들은 방앗간에서 누르고. 그리고 장에 가서 꿩하고 닭 한마리를 사와. 그 고기 국물하고
동치미 국물을 섞는 거지. 꿩을 써야 육수가 안 텁텁하고 개운해. 요즘엔 그런 집들이 없겠지만...” 김현수(75)
평생 동안 냉면을 먹어온 이북 사람들의 말을 듣다보면 ‘왜 평양냉면이 50년 동안 서울에서 인기가 높았는 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서울 사람들이 평양냉면을 선호하는 이유는 몇 가지로 요약된다.
‘구수한 입맛이 돌면서 텁텁하지 않은 육수, 소면 굵기의 쫄깃한 메밀 국수 그리고 한 여름 더위를 날려줄 시원한 국물' 등이다.
늦가을에 메밀을 빻아 국수를 뽑고, 초겨울 김치가 익을 무렵의 동치미국물로 담근 평양냉면은 태생부터 이런 메리트를 갖고 있었다.
여기에 돼지고기·쇠고기 수육이나 만두를 곁들이게 되면 여름 시즌 최고의 외식 메뉴가 된다. 평양냉면이 오랫동안
서울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온 이유다.
한 가지 더 있다. 주로 이북 출신들이 내려와 청계천, 을지로 등지에 자리잡은 '
오래된 평양냉면집'들은 서로 의식하고 경쟁하면서 그 가계만의 독특한 냉면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현재 2세대 오너들이 대를 이어 저마다 정형화된 레시피를 갖췄다는 점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대로 하고 있다” 내지는 “우리 집은 본래 이런 식이었다”라고 말한다.
물론 수십년 동안 조금씩 변형됐을
것이다.
육수를 재료인 꿩고기가 그렇다. 지금은 꿩 대신 쇠고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본래의 맛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 재료적인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업그레이드한 '서울 맛'을 재창출한 것이다
우래옥
1946년, 평양 출신 장원일(작고)씨가 을지로 근방에 문을 연 우래옥은 애초부터 평양 출신 냉면 주방장이 있었던
곳이다. 한국전쟁 직후 이 곳에 들어가 당시 주방장이었던 주병인(작고)씨로부터 냉면을 배웠다는 김태원(76)씨는
“주방 옆에서 쪽잠을 자다가 새벽 4시에 주방장이 발로 차서 깨우면, 냉큼 일어나 장작을 떼서 고기 삶는 물을 끊였다”고 전한다.
1960년대 우래옥 냉면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는데,
“일요일에 창경궁 구경나온 서민들이 외식 메뉴로 대부분 냉면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하루에 “360초롱(1초롱은 약18ℓ, 냉면 30그릇 분량의 육수) 정도를 냈다”고 하니,
손님이 하루에 1000명은 족히 넘었다는 셈이다.
1960년대 초반부터 이 곳에서 일해온 김지억 고문은 “냉면 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육수
재료는 여러 번 변했다”고 한다. 가장 큰 변화는 88올림픽 전까지는 육수 재료로 쇠고기·돼지고기·닭고기 등 종류를
따지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는 쇠고기 만을 고집했다는 점이다.
“80년대 후반, 지금의 자리로 옮긴 이후에 사람들이 불평을 하기 시작한거야. 왜 비싼 냉면에 돼지고기가 들어있냐는 거지.
그때는 꾸미에 돼지고기랑 쇠고기를 같이 올렸거든.
그래서 ‘좋다, 그러면 우리집은 돼지고기 안 쓴다’ 그러고서는 육수나 꾸미를 모두 쇠고기로만 했지.” 김 고문의 말이다.
시내 유명 냉면집 중에서 오직 쇠고기로만 육수를 내는 집은 그리 많지 않다.
보통 다른 집들은 육수에서 고기 냄새를 없애기 위해 양파·대파 등을 함께 넣어 끊이지만, 이 곳만은 오직 쇠고기 삶은 물에 그대로 내는 것이다.
현재 우래옥의 냉면 주방장 설동창(41) 씨는 육수를 끊일 때 “고기 삶은 물에 소금과 간장으로 간을 할 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넣지 않는다”고 말한다. 쇠고기 또한 “한우만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우래옥 냉면은 구수한
맛이 진하게 배어나온다. 다른 집에 비해 "육수가 짜다” “간에 센 편이다”라는 평을 받는 것도 그런 연유다.
오직 쇠고기만으로 육수를 내는 평양냉면은 애초 ‘꿩고기 육수와 동치미’로 대변되는 본래의 평양 스타일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래옥에는 수십년 동안 이 곳만을 고집해온 단골들이 많다.
50년 단골이라는 박윤성 씨는 “20대 시절 이 곳에서 먹었던 냉면과 변함없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이집 냉면은 동치미 국물 맛이 일품”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40년 넘게 우래옥에서 일해온 김 고문은 “한번도 냉면 국물에 동치미를 섞어 판 적이 없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랜 단골들에게 우래옥 냉면은 ‘향수’ 자체인 셈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시대에 따라 변하는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육수 레시피
재료: 물 약 100ℓ(솥의 2/3), 양지·사태 살 42kg, 소금 약 2.3kg, 간장(삼화 ‘맑은 국간장’) 약 4ℓ
* 매일 아침 180ℓ짜리 솥 2~3개에서 끓여낸다. 쇠고기 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넣지 않는 게 특징이다.
■ 국수
메밀과 전분의 비율은 겨울철에는 3:1, 여름철에는 2:1 비율로 섞는다.
봉피양
봉피양은 벽제갈비 본점(방이동)에 딸린 냉면 전문점이다.
전통의 명가는 아니지만, 평양냉면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김태원(77) 조리장이 2002년부터
이곳에서 냉면을 내고 있다는 점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다른 직원들은 그를 ‘냉면 어르신’으로 부른다.
그는 1950년대 초반 우래옥에서 평양냉면 조리법을 전수받은 이래, 60년 후반 이후 “서울에서 이름 있는 냉면집은
대부분 (내가) 코치했다”고 주장할 만큼 냉면에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이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명 냉면집 주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평양냉면을 전파한 장본인이라는 점은 업계 종사자들 대부분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냉면 전도사’라 이르고, 혹자는 서울식 평양냉면을 혼란에 빠트린 장본인으로 보기도 한다.
그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평양냉면의 레시피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현재 봉피양의 평양냉면 레시피만 봐도 이런 ‘혼란’은 엿보인다. 일단 육수에 들어가는 재료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쇠고기·돼지고기 등뼈와 노계(늙은 닭)를 넣는다는 점이다.
김 조리장은 “등뼈는 진한 맛을 내기 위해, 노계는 예전에 썼던 꿩 대신에 쓰고 있다”고 전한다.
또한 고기를 한번 삶은 물에 파·무·마늘 생강·양파 등 많은 양념 재료를 넣고 한번 더 끊인다.
물론, 고기 냄새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우래옥의 김지억 씨는 “좋은 고기를 쓰지 않기 때문에 냄새를 빼려고 그런 쓸데 없는
것을 많이 넣은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두 사람은 한때 우래옥에서 같이 근무했던 경험이 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봉피양 냉면은 육수 10ℓ에 동치미
국물 1ℓ를 섞다는 것이다. 시내 유명 냉면집에서 이렇게 철저한 비율로 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섞어내는 집은 드물다.
동치미는 차갑게 담궈 사이다처럼 톡 쏘는 맛이 나는 이북식보다는 서울식에 가깝다. 배추와 무 등이 적절히 들어간
시원한 국물이다.
육수 맛을 내는 다양한 재료, 육수와 동치미의 정확한 배합 등은 50년 넘게 냉면 농사를 지어온 김태원 조리장만의
노하우임은 틀림없다. ‘김태원의 냉면’이 지금까지 여러 매스미디어를 통해 자주 ‘가장 맛있는 냉면’으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 육수 레시피
재료: 물 240ℓ, 쇠갈비등뼈 돼지등뼈 10kg, 사태·양지살 각각 30kg, 노계 4마리, 파 3kg, 무 2개, 마늘 2kg, 생강 300g, 양파 10개
* 매일 아침 6시 15분에 끊인다. 보통은 이틀에 한번, 여름철에는 매일 한 차례씩 끊인다. 육수 10ℓ에 동치미 1ℓ
섞는다.
■ 국수
메밀과 전분을 보통 3:1 비율로 쓴다. 장마철에는 1:1까지 섞어 쓰기도 한다. 메밀가루는 음식점에서 직접 빻아 쓴다.
평양면옥
평양면옥을 ‘평양냉면의 원조’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의정부 평양면옥을 포함해 을지로의 필동면옥·을지면옥,
최근 잠원동에 생긴 본가 평양면옥까지 서울의 유명 냉면집들이 모두 한 집안의 2세대들이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영남(2000년 작고) 씨가 경기도 전곡에 평양냉면집을 연 시기는 1970년, 다른 냉면 명가에 비해 상당히
늦은 편이다. 홍 씨의 자녀 중 현재 의정부 평양면옥 대표로 있는 장남 홍진권(57)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군대 제대하자마자 가게에서 일을 돕기 시작했어요. 아버지는 육수를 끊이시고, 어머니는 메밀가루를 빻아 국수를
내고, 저는 자전거에 배달통을 달고 냉면을 배달하러 다녔죠. 당연히 세 여동생은 국수 뽑고, 서빙하는 일을 거들었겠지요. ”
평양면옥은 전곡·의정부 버스터미널을 거쳐 1987년 지금의 자리인 지하철 1호선 회룡역 부근에 자리잡았다.
이 즈음 첫째딸 홍순자(55)씨가 현재 대표로 있는 필동면옥(1985년 개점)과 을지면옥(1985년 개점)이 을지로
부근에 자리잡으면서, 이들 남매의 ‘냉면 일가’는 서울을 대표하는 냉면집으로 이름을 알린다.
당시 서울 중심에는 우래옥·한일관·거북성 등 쟁쟁한 냉면집들이 많았지만, 후발주자였던 필동면옥·을지면옥이 서울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이다.
남매의 냉면 육수 내는 법은 비슷하다. “아버지는 항상 좋은 재료를 써야 한다고 하셨어요.
의정부 포함해서 4남매가 하는 냉면집 모두, 가게 안에 방앗간이 있지요. 육수 레시피는 예전 방식 그대로구요.
그 때도 돼지고기, 쇠고기를 함께 삶았죠. 다른 데는 양지 살을 같이 쓴다고 하는데, 우리집은 사태만 써요." 필동면옥 홍순자 씨의 말이다.
메밀은 커피를 로스팅하듯 “그날 그날 쓸 양만 빻고”, 육수는 애초 기름기가 적게 빠지는 사태살만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의정부의 홍진권 씨는 “주방장을 두지 않고, 직접 육수를 끊여낸다”고 덧붙인다. 이는 “아버지가 하던 방식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이라고 말한다.
평양면옥(의정부·필동·을지면옥 등)을 자주 찾는 냉면 마니아들은 “국물이 깔끔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국물이 텁텁하지 않고, 간이 세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홍진권 씨와 홍순자는 “고기를 삶아 육수 원액을 만든 다음, 소금 간을 하고 물을 조금 붓는다”고 말한다. 일정 정도 물과 희석한다는 것이다.
■ 육수 레시피(정확한 레시피 공개하지 않음)
재료: 물 한 솥, 돼지고기 삼겹살, 쇠고기 사태살,양파·대파 적당량, 소금 일정량
※ 매일 아침 한 차례씩 끊인다. 육수를 만들어 식힌 후 원액에 물을 더 부어 사용한다.
■ 국수
음식점에 있는 방앗간에서 직접 빻아 쓴다. 메밀은 중국산을 쓴다. 메밀과 전분(고구마)의 비율은 보통 3:1,
여름철에는 전분 양이 많아진다 |